한국 103위 순교 성인화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
1810년 경기 이천의 ‘동산밑’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성인은 5세 때 부모를 여의었다. 양반인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성인은 서울에 사는 한 여교우의 양자로 살아가게 됐다.
성인은 효심이 깊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성인은 어려서부터 독신으로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했지만, 혼인을 바라는 양모에게 순명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수덕생활을 하며 신자들을 돕고 살았다.
성인은 선교사로 파견된 사제들을 위해 봉사하는 복사의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성 모방 신부와는 1년 이상 함께하며 각 지역을 따라 다니며 손과 발이 됐다. 또 당시 국내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주교와 신부들이 숨어있는 곳을 방문하며 박해상황과 신자들의 생활을 일리는 등 선교사들의 눈과 귀가 돼주기도 했다. 신자들과 함께 순교한 선교사들의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르는 역할도 했다.
신자들 사이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거나 옥에 갇힌 신자들을 돕고자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박해 속에서도 다방면 교회에 헌신하던 성인은 박해자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움츠려드는 일 없이 박해자들의 손길을 피해 다니며 더욱 교회의 일을 돌보는데 열중했다.
성인은 선교사의 시신을 수습한 후 피신하려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성인은 “천주께서 특별한 은혜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시는 소리에 대답을 아니할 수 있겠는가”면서 박해자들 앞으로 나아갔다. 포도청이 끌려간 성인은 심문을 받았지만, 박해자들은 성인의 입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다. 포도대장은 성인이 집안이 훌륭한 양반이라는 것을 알고 술과 음식을 동원하는 등 갖은 회유했지만, 성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이 심문과 회유를 당하던 옥중에서 천주가사 ‘옥중제성’을 썼다고 전해진다. 성인은 양모와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 옥중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모습과 자신의 신앙고백을 남겼다. 또 ‘옥중제성’의 가사가 말하듯이 신자들이 박해로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기를 당부하기도 했다. 마침내 성인은 1840년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했다.